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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여행, 혹은 상상에 대하여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시2011/04/11
  • 조회수18732
영화와 여행, 혹은 상상에 대하여, 대전일보 기자, 김형석

하바나 영화포스터영화 ‘하바나’를 보고 어떤 이는 사랑을, 어떤 이는 혁명을 논한다. 정확히 말하면 둘 모두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잭은 소위 도박꾼이다. 일생일대의 큰 판을 기대하며 쿠바로 향하던 잭은 배에서 혁명가의 아내 바비를 만난다. 잭이 바비에게 첫 눈에 반하면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반군에 함락되기 전 8일 동안 하바나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운명적인 사랑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감독 시드니 폴락은 아마도 사랑과 혁명에 몸을 던진 이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은 맹목적인 열정과 희생인지도 모른다. 잭으로 열연했던 로버트 레드포드의 사랑에 빠진 애절한 눈빛 연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카사블랑카’를 흉내냈던 이 영화는 많은 찬사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 만큼은, 카사블랑카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비행기에 홀로 태워 보내고 코트깃을 올리던 험프리 보가트의 우수에 찬 연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영화 ‘그랑블루’를 두고 어떤 이는 우정을, 어떤 이는 희망과 절망을 말한다.


주인공 자크와 엔조는 그리스의 작은 어촌에서 잠수 실력을 겨루며 우정을 키운다. 성인이 돼서 다시 만난 두 사내. 여전히 그들의 소통법은 잠수며 우정을 확인하는 방법 역시 잠수다. 그런데 나란히 출전한 잠수대회에서 엔조가 숨을 거둔다. 자크에 대한 열등감으로 한계선을 넘는 잠수를 시도한 게 화근이었다. 친구가 죽은 게 자기 때문이라고 고민하던 자크도 어느 날 깊은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다. 다시는 수면 위로 오르지 않는 마지막 잠수를 시도한 것. 진한 우정을 나누면서도 치열하게 경쟁했던, 희망이 보일수록 알 수 없는 절망에 다가서는 두 사내. 감독 뤽 베송은 결국 사내들의 우정과 경쟁, 그리고 희망과 절망, 그 사이를 관통하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하바나와 그랑블루는 아름다운 음악과 명장면으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가 이처럼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바로 쿠바와 그리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배경이 된 그 그들은 별다른 장치와 조명을 하지 않았음에 도 거대한 세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그랑블루 영화포스터폭풍처럼 몰아치고 있는 혁명의 와중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쿠바의 전원과 바다. 그랑 블루를 보고 나면 그리스는 온통 파란색과 흰색으로 뒤덮여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푸른 바다, 그 수평선 가까이에서 수면 위로 돌고 래가 용솟음 치고 있는 장면을 담은 포스터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낯이 익을 정도로 유명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얘기하고 싶은 게 영화가 아니란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쿠바와 그리스를 동경한다. 이유도, 계기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내가 이 나라들을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영화들을 통해서였다. 이후로도 영화를 통해 자주 여행을 꿈꾸곤 했다. 분명 여행을 떠나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영화 역시 어느 것을 보느냐로 가끔은 망설임을 주기도 하지만, 여행은 어느 곳으로 가든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영화가 짧은 ‘일상에서의 탈피’라면 여행은 긴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많은 이들이 대학생들에게, 젊은이들에게 영화를 권한다. 이유도 대부분 비슷하다. 하지만 정작 여행의 즐거움은 체험과 경험이 아니라 상상의 즐거움이다. 내가 상상했던 것을 확인하는,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여행이 생활을 좀 더 여유있게 하는 이유다. 또 여행이 영화와 비슷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오해 마시길. 반드시 여행지가 꼭 쿠바나 그리스 같은 곳일 필요는 없다. 본인 역시 쿠바(아예 그쪽 방향으로는 갈 일이 없었고)와 그리스(우연한 기회에 떠났던 패키지 여행에서 잠시 들렀을 뿐)는 별 인연이 없었다. 영화 하바나와 그랑블루가 인상적이었 던 것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무한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로. 하바나에서 주인공 잭(로버트 레드포드)은 최후의 한 판을 대비해 늘 몸속(팔뚝)에 다이아몬드를 지니고 다닌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잭은 이 다이아몬드를 망설임 없이 꺼낸다. 그랑블루에서 주인공 자크(장 르노)는 친구를 잃은 죄책감에 괴 로워한다. 그러던 어느 어두운 밤, 그보다 더 어두운 바닷속으로 끝없이 잠수해간다. 하바나에 가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까? 그리스에서는 사랑하는 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계상황까지 나를 내몰 수 을까? 그런 열정들이 생길까? 영화를 보는 것 만큼은 아니더라도 여행을 자주 떠나보시길. 그리고 상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맛보시길. 기껏해야 매주 뒷산에 오르는 것으로 일상의 탈출을 대신하고 있는 겉늙어 버린 이의 충심어린 권고다.